빠삐용을 만나다
본문
탈옥에 또 실패한 사내는 칠흑의 독방에서 빛으로 오신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
“가련한 아들아, 너의 죄를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구나. 너는 그토록 소중한 네 젊음을 방탕하고 헛되이 흘려보냈다. 사랑과 용서를 위해 마련된 시간들을 분노와 미움으로 가득 채웠다.”
그는 파도가 허연 이빨을 드러내며 아우성치는 바다에 몸을 던져 자유를 찾았다. 그 때에 서슬 퍼런 복수의 칼도 바다에 던져버렸으리라. 앙리 샤리에의 실화를 각색한 <빠삐용>이다.
졸고 <탈출>의 한 대목이다.
이곳 여수의 자산공원에서 빠비용과 조우했다. 나는 아담한 곤충전시관 ‘빠비용’을 둘러보다가 제왕나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해마다 봄이 오면 수만 마리의 제왕나비가 캐나다에서 5,000킬로미터를 날아 멕시코 미초아칸 주의 작은 마을에 찾아든다. 마을에서는 나비의 귀환에 맞춰 축제가 벌어진다. 마을사람들은 죽은 가족들의 영혼이 나비가 되어 찾아온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제왕나비의 수명은 길어야 1년이기에 멕시코를 찾아온 제왕나비들은 그곳에 잠들고 2세들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조상의 땅 캐나다로 돌아간다.
지구상의 곤충은 대략 80만 종에 달한다. 우리나라에는 1만 2천 종의 곤충이 서식하는데 이곳 빠삐용 관에는 350종 5천 마리의 곤충이 영원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오랜만에 만난 청띠제비나비는 이곳 빠비용관의 J관장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20여 년 전에 오동도 후박나무 숲에서 이 나비를 최초로 발견하여 관련학회에 보고한 이가 바로 J관장이다.
나는 나비 가족을 차례로 만나본다. 호랑나비, 내발나비, 뿔나비, 오색나비, 은판나비, 유리창나비, 알락나비, 멋쟁이나비.... 그야말로 낯선 이름이지만 왠지 정다운 얼굴들이다. 나방은 칙칙하고 징그러운 존재로만 생각해온 나에게 온갖 아름다운 나방이 가만히 다가와 편견을 벗어던지라고 일러준다. J관장과 또 다른 곤충 생태가 K연구원이 심혈을 기울여 연출한 비단벌레의 일사불란한 모자이크 군무에 나는 그만 넋을 놓는다. 노린재와 베짱이, 사마귀와 잠자리, 매미와 여치와 풍뎅이의 모습에 내 눈은 호사를 누린다. 소년시절, 장구애비와 게아재비, 소금쟁이, 물장군과 함께 뛰놀던 마을 앞의 개울이 긴 잠에서 깨어난다. 홀로 들길을 걸을 때면 오색으로 반짝이는 길앞잡이가 벗이 되어주었다. 검게 윤기 흐르는 사슴벌레를 잡아 호주머니에 넣고 와서 동무들에게 자랑하던 철수의 얼굴도 저기 웃고 있다. 참나무 고목에서 잡아온 사슴풍뎅이의 앞발을 떼고 고개를 비틀어 뒤집어놓고 ‘사또야, 사또야. 마당 쓸어라’를 주문했던 철없던 이야기도 다시 들려온다. 내 유년의 산천을 그리움의 추억으로 일깨우는 곤충의 세계가 새삼 이채롭다.
나는 십여 년 전에 어느 야생화 전시장에 들렀다가 적이 실망한 경험이 있다. 그곳에는 나와 자주 만나는 쇠비름, 바랭이, 명아주, 닭의장풀, 민들레, 방가지똥, 왕고들빼기, 달맞이꽃 같은 들풀들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이곳 빠비용 관에서도 우리 주변에 흔한 해충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고 곤충의 변태과정 등 생태에 대한 전시가 미흡하여 아쉬웠다. 어느덧 15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변변한 전용건물을 마련하지 못하고 남의 집에 세 들어 사는 옹색함 탓이겠다. 좋은 자리에 어엿한 전시관이 세워지는 꿈을 그려본다.
곤충의 영역은 미개척의 신세계나 다름없다. 각국은 다투어 이 ‘무한한 자원’에 눈을 돌리고 있다. 벌과 나비의 역할은 두말할 나위 없지만 곤충은 이미 미래 인류의 소중한 식량자원으로 떠오르고 있다.
바깥의 자그마한 온실에선 하얀 나비들이 배추꽃과 사랑에 취해있었다. 근처에 심어놓은 허브식물 라벤더, 로즈메리, 차이브, 페퍼먼트, 케모마일, 베르가모트가 서로의 향기로 교향악을 연주하며 J관장이 자유를 선물한 하얀 나비를 손짓한다.
자산의 옛 이름은 척산(尺山)이다. 케이블카가 정상을 달리는 자형(字形)이 야릇하다. 자산에는 1967년에 건립된 국내 최대 높이(15미터)의 충무공이순신상이 남해를 굽어보고, 동으로 내려다보이는 국립공원 오동도는 거대한 나비로 화하여 창공으로 비상한다. 전국에 산재한 곤충박물관이나 전시관에 비하면 이곳 빠삐용 관은 초라하다. 하지만 J관장과 K연구원은 나비를 비롯한 많은 곤충의 영혼마저 사랑하는 ‘곤충에 미친 사람들’이다. 나는 빠삐용의 관장을 ‘조 박사’라 부른다.
댓글목록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