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와 광주5.18 그리고 대한항공폭파

profile_image
백태종
2017-07-28 13:29 1,751 0

본문

1979년4월 신장암진단을 받은 박정희와 딸박근혜는  정권승계 및 도미수술계획을 세우고 준비절차에 착수한다.
79년10월26일  밤9시를 기해 전두환보안사령관, 최규하국무총리, 정승화육참모장, 김재규중정부장,김계원비서실장,
이희성, 노태우등은 짜여진각본에 따라 각자 역할대로 작전에 돌입한다. 27일 새벽 3시 박정희는 서울공항에서
차지철경호실장,경호원5명과 함께 송별나온 전두환을 뒤로 하고 미군수송기를 타고 미국으로 향한다.
80년 4월1일 밤12시부터 다음날 오전11시까지 미국메를린대학병원에서 차지철이 제공한 신장으로 이식수술을
받는다. 공교롭게도 이병원에 재미교포3세 리차드최가 외과 인턴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80년 미국시각 5월17일 전두환으로부터 광주사태를 보고받은 박정희는 급거귀국결정을 하고 17일 밤10시20분
케네디공항발 대한항공여객기를 타고 김포공항에 도착한다.비행기에 예약된 모든 승객은 취소하고 박정희와
경호원2명만 탑승하였다. 대통령경호주임 이영도는 여승무원2명이 박정희를 목격했다는 이유로 박정희
지시로 마취시킨 상태로 한강에 던져 살해 하였다. 유족들이 지금도 애타게 찾고있다.
박정희는 5월19일 밤12시에 광주공설운동장에 군용헬기를  타고 도착한다. 이전에 박정희는 19일 새벽1시부터
시위군중에 대하여 실탄사격명령을 내렸다. 전남도청에 잠시들렀다가 전남대로 갔다.
전남대에서 2박3일동안 작전수행을 하고 서울로 올라온다. 박정희를 목격한 사람을 찾을 수있을 것이다
전남대주변국밥집에서 식사를 했기때문이다. 군인들의 총통이라는 구호아래 사열하는 소리를 들은 증언자도
찾을 수있을 것이다. 이과정에서 수술부위의 실밥이 터진 박정희는 미국으로 가 재수술을 받는다.
82년에 국내에 잠입하여 성북동에서 은거하게 된다. 84년5월4일 서울대의대 초청으로 국내에 온 리차드최는
6일 박정희의 식사초대를 받는다. 식사중 독재자란 말을 듣고 격분한 박정희는 살해지시를 한다.
6일밤10시 경기도 광주군 오포읍 모현리 장세동 전안기부장부인소유의 목재공장에서 마취된 상태에서
전기톱날에 살해당한다. 현장에 박근혜와 정윤회가 있었다. 다음날 피묻은 전기톱날을 닦은 공장직원들의
증언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87년10월4일 밤10시 청와대 대통령집무실에 전두환, 박정희, 노태우, 박근혜가 정국에대하여 논의하고
있었다.
박근혜: 우리 아버지 어떻하실레요.
전두환: 우리가 알아서 할테니까 집에 가있어.
박정희: 내가하지
박정희는 작전계획을 세우고 정치밀약에 의하여 김일성에게 미화5000만불을 지급하고 일본오사카
조총련간부의 딸인 김현희 본명최수지 를 오사카 영사관을 통해 한국으로 데려온다. 김현희는 아무것도
모른체 한국에 왔다. 오사카현지를 가면 김현희에 대한 증언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후로 박정희는 거문도 안가에서 은거한다.박정희는 92년 봄 신당동 자택에서 숨을 거둔다.
차지철은 2015년까지 캐나다 퀘백주에서 가족들과 함께살다 죽었다. 김재규는 작년말까지 박근혜의 경제적
도움으로 파리근교 세느강주변아파트에 살았었다.
 

댓글목록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